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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아브라함의 족보 -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야 합니다.
글쓴이 : 이상호목사 날짜 : 09-08-10 08:31 조회 : 3019

아브라함의 족보 -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야 합니다.


창 11:10-32                                                                                    09. 8. 9, 오전


오늘 본문 이야기는 10-25절 까지는 셈의 족보이고, 27-32절까지는 데라의 족보로 특히 아브라함의 어릴 때 가정사입니다. 앞의 족보는, 주로 누가 몇 세 때 자식을 낳았고 몇 세를 더 살다가 몇 세 때 죽었더라 하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의 족보는 거기에다 특별히 한 요소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그 곳을 떠났더라"라는 요소입니다. 이사를 간 것에 대해서 중요시 함을 봅니다. 즉 아브람의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된 점을 살피면서 본문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드라마를 좋아하십니까? 혹시 드라마에 쏙 빠지신 분은 없습니까? 주일날이 기다려지는 것보다 연속극 드라마를 보는 날이 더 기다려지지는 않습니까?

방송국에서 사활을 걸고 심혈을 기울이는 드라마는 대하 드라마입니다. 대하 드라마는 짤막한 드라마가 아니라 아주 웅장하고 긴 드라마를 말합니다.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합니다. 최고의 연기자들을 출현시킵니다. 그리고 출현하는 배우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시청율 1위의 드라마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하 드라마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 가장 재미있는 드라마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드라마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될 드라마입니다.

무슨 드라마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바로 구속의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는 지에 대한 드라마입니다. 구속의 드라마는 창세기부터 시작하지만 본론은 창세기 12장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죄악은 점점 더 깊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것에 실망을 하시면서 사람을 이 땅에서 쓸어버릴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이 노아 홍수입니다. 노아의 가족 외에는 홍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경건한 자손들도 또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탑을 쌓기까지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지면에서 흩어버립니다. 인간의 타락은 계속되었지만 인간을 구원하려는 계획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절대적으로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 한사람을 통하여 흩어진 자들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모아들일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원대한 구속 계획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는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구속의 드라마를 주일마다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구속의 드라마의 연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주인공은 누구신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흥분되지 않습니까? 주인공이 드라마에 빠져서는 되겠습니까? 이 드라마는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한 주일도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이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 되었을 때 불렀다는 것입니다.

 

30절을 보면,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속 계획의 주인공으로 부르시려고 하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아이가 없었다(:30)는 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문제와 아주 크게 상관이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독신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도 많고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아주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곧 '소멸' 그리고 '죽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당시 사회 문화 속에서는 죽은 자입니다. 이런 죽은 자를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무력할 때,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느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좌절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떤 형편에 놓여있을 때 우리를 불렀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다고 말씀합니다. 맞습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나의 그 무엇을 인정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내편에서 볼 때 자랑할 것이, 내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입니다. 마치 냄새나는 송장과 같았습니다.

어떤 분은 내가 건강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고 말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었던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부자였을 때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뱅이였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높은 지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영적으로 사탄의 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브람과 같은 분은 없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십니까? 자신의 한계를 느끼십니까? 남다른 고통을 안고 있습니까?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절망 중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아브람에게 찾아가셨던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갈 때입니다. 아니 이미 이 시간 여러분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목마른 곳에서 생수의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입니다. 이 갈대아 우르는 아브람의 고향이며, 아브람의 본토이며 아브람의 인생의 출발지입니다.

이 도시는 이미 4000년 전에 무역이 성행했고 상업이 번창했던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인구가 30만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문화가 발달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 있는 것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이름의 뜻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목마르다", "폐허가 되었다", "황폐하다"라는 뜻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겉으로 볼 때는 무역이 성행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그 당시로는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뭔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목마르게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 원인을 여호수아 24장 2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서 다른 신을 섬겼으나"

왜 갈대아 우르 사람들은 갈증을 느꼈습니까? 왜 마음이 황폐했습니까? 우상 숭배의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아무리 부유한 생활이었지만 목말라한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갈대아 우르는 우리들의 옛 모습과 비슷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남편을 다섯이나 가져보았던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목말라 했습니다. 그에게도 생수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시면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문명의 부요와 풍요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공허를 느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와 주심으로 그 땅을 떠나게 함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목마른 땅에서 생수의 땅으로 옮겨왔습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돌이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혼의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까? 여전히 목마르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십니까? 여전히 물질적 풍요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여기에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영접하시고 구원의 길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세째로 우리는 절반의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1)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하란이라는 곳에서 불러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7장과 창세기 15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하란에 있기 전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나타나셔서 이 땅을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는 아브람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에 동의를 하여 아들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데라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지만 목적지에는 가지도 못하고 중간 지점인 하란이라는 곳에 그만 머물고 말았습니다. 하란이 목적지가 아닌데 하란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하란"이라는 지명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란"의 뜻은 "교차로"라는 뜻입니다. 이 하란은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무역로의 교착점이었습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보다 훨씬 번창한 곳이므로 이곳 사람들은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더구나 이 하란의 문화는 데라가 떠나온 우르 지방의 문화와 아주 비슷하였습니다.

그들이 섬겼던 똑같은 이방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이곳 생활에 익숙해 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데라는 이곳 하란에서의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벌어서 먹고살기는 이곳이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서 이 데라는 그만 그곳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공교롭게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올라가는 길이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내려가는 길입니다. 이 하란은 중간 지점이며 분수령이었다고 합니다.

데라는 이 하란이라는 분수령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만 그 분수령을 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하란이라는 곳은 데라와 그의 식구들에게는 그냥 지나가야 하는 곳인데 그만 그곳에 정을 붙이고 살고 말았습니다. 데라는 가나안 땅에 대한 꿈을 버리면 안 되는데 그만 살기 좋은 그곳에 재미를 보다가 온통 마음이 다 빼앗겼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주 큽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출발은 힘차게 내딛었으나 여러 가지 세상 재미 때문에 중간에 머물러서는 신앙의 발전이 없고 그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는 재미 때문에 열정도 사라지고, 헌신도 사라진 채 교인 흉내만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 대한 매력은 계속 줄어들고 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은 아예 없는 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분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주저앉아 서는 안 되는 곳에 앉아있습니까? 왜 멈추었습니까?

왜 자구만 세상으로 끌려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들이 묻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들이 묻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대답을 해 보세요!!!! 하란입니까? 아니면 가나안 땅입니까?

가나안 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원히 하란 땅에서, 영원히 이 땅에서 사는 사람처럼 살아가십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란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들이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힘든 길을 걸어서 하란까지 올라왔다면 거기서 무한정 머물 것이 아니고 곧장 정들지 말고 가나안 땅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등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등산하는 사람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고 하여 그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례의 길에 있는 자들인데 순례자의 길은 등산이 목표가 아닙니다. 올라간 산은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들도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 정도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변합니다. 아주 무서운 생각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절반의 신앙으로 만족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절반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렀던 것이 아닙니다.

가장 보기 싫은 것 중에 하나가 어중간한 것이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나 그 앉아있는 자리를 떠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는 나그네의 길에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라는 교훈입니다.

 

아버지 데라의 어중간한 신앙의 자세는 그의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아브람은 비교적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찍 가나안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 머물므로 아브람도 그냥 그기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라가 하란에 계속 머문 것은 아브람의 소명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모님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계속 행진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고 성원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간혹 부모들이 잘못된 생각과 부모의 권위를 가지고 자식들을 묶어두면서 가나안에 대한 비전을 흩뜨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데라의 중도하차는 다른 믿음의 가족들에게 오히려 불필요한 시간을 지연시켰습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볼 때 데라는 순례길의 거침돌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적용을 해 볼까요?

나 자신에게도, 데라가 있습니다. 나의 순례길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나의 데라가 내 속에 오래 살면 살수록 나의 순례길은 자꾸만 지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데라는 빨리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있어 데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그 모든 것들입니다.

나의 온갖 죄악들일 수도 있고 세상에 물들어 있는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 세상과 구별하지 못하는 나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런 더러운 것들을 벗어버려야만 가볍게 하란을 떠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다가 가는 단순히 지나가는 곳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여장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더 가야할 곳이므로 피곤하더라도 주저앉고 싶더라도 세상이 나에게 달려와 머물라고 유혹하더라도 묵묵히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히12:1-2).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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