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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수기]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글쓴이 : 이상호목사 날짜 : 20-05-06 21:56 조회 : 33

함께 읽기/ 이상호 목사(1339)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오늘 따라 유난히 어머니가 보고 싶다. 곁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벌써 27년 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살아계실 때에 좀 더 따듯하게 모시지 못한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의 어머니는 1920. 2. 9일 충남 서천군 마서면 옥산리 파평윤씨 가문에서 태어나시어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큰댁, 중백부댁에서 성장하시며 엄한 아버지 몰래 교회당에 나가 신문학을 접하시다가 요절나기도 하셨고 새 어머니의 눈총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가난한 이씨 가문에 시집 오셔서 평생을 고생하시다가 1993. 6. 29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때는 일제하 암흑기여서 만주로, 봉천으로, 피난생활로 신혼기를 보내시다 해방된 후 고향 부여에 돌아와 무자년(1948년) 대 홍수로 집이 완파되고 가족들이 큰 상해를 입으며 어머니께서는 앞마당 두엄무더기에 걸려 살아남으셨고, 다시 집 없는 생활로 이웃집 사랑방 신세를 지셨다고 들었다.


27세 젊은 나이에 시아버지를 여의고 나이 어린 남편이 가장이 되니 손아래 두 시동생과 두 시누이를 돌보는 맏며느리로, 게다가 놀기 좋아하는 한량(閑良) 남편 때문에 대가정의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땅 한 평, 집 한 칸 없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님과 큰 형님을 남의 집 사랑방에 놓아둔 채 부여, 서천, 보령 3군계 고갯마루에 집을 짓고 오가는 사람 쉬어가며 목 축이는 주막을 하시다가 6.25가 터져 나라 살림, 가정 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식구는 늘어나니 당신은 참다못해 남편의 만류를 극복하며 아버지 술장수를 도우셨다.


그로부터 어언 30년 세월을 남몰래 눈물 훔치며 8남매를 키우셨고, 양자 간 시동생이 잘못되어 돌아왔을 때 3년씩이나 동거했고 절골 당숙과 조카(5촌)가 잘못되어 동거할 때 등등 줄잡아 식객이 평균 열 명이 넘었지만 아무 잡소리 없이 살림을 해내신 장한 어머니는 사업가로서, 성깔있는 시어머니 밑의 며느리로서, 주부로서, 아내와 어머니로서, 그리고 엄한 유교전통의 완강한 남편의 뜻 받들어 진조 할머니, 고조부님의 제사까지 모셨다.


가난하여 못 먹고 못 입어 큰형이 입던 옷 작은 형이 입고, 작은 형이 입던 옷 내가 입으며 살아도 좋았다. 다만 마진 많고 맛 좋은 술 만들어 파신다고 밀주를 만드셨다가 세무공무원이 들이닥쳐 큰 소리 칠라치면 무거운 술독을 들고 뒷간으로 도망치시며 당황하시던 어머니를 부끄러워했었다. 그 때 양지가 저렇게 해서 번 돈으로 편안히 학교 다닐 수 없다고 제법 철든 양, 학교를 그만둔다고 소가지 부릴 때 공부 못해도 좋으니 제발 학교에 가라고 눈물 흘리며 통사정 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여 눈가가 촉촉해 진다.


회갑을 지내시고도 모시를 하여 베를 짜시며 한 올 한 올 희로애락의 한 가정사를 엮어가시던 어머니께서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시며 고생하시는 어머니는 맛있는 것을 사다 드려도 잡수시지 못하고 얼굴이 가려워도 힘이 없어 스스로 긁으실 수 없어, “얘야, 여기 좀 긁어다오”하시며 찡긋거리시던 쪼그라진 어머니의 얼굴에서, 자식들이 드렸던 용돈을 다 모아두었다가 탕난 돈을 가리키시면서 가장 어려운 때 태어나 고생 많이 한 큰 누님(승광교회)과 동생네 은성교회, 그리고 세광교회에 헌금하라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저 설악산 꼭대기 고목이 썩어져가며 자신의 흉한 몸을 녹여 산천초목의 거름이 되는 것을 보았고, 예수요, 십자가를 보았다.


1993년 6월의 마지막 주일 밤 예배를 마치고 형제 목사사위, 형제 목사, 집사자녀들에게 아무 폐도 주지 아니하시고 평안한 모습으로 영원한 잠에 드셨다. 오늘은 그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다.


어버이날을 보내며 이번에는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1918. 6. 28일 부여군 옥산면 대덕리에서 출생하여 일제와 6.25를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어머님과 겹치기에 말년에 집중하여 본다. 노후에 다리를 못 쓰셔서 불편하시지만 여행을 좋아하시기에 공주, 서울, 인천 등 5남매가 두루 모셔가 여행을 하시고 설을 쇄신 후 아버님을 모시던 서천 동생 집에 돌아와 감기로 고생하시다가 점점 몸이 쇠약해지시더니 1997. 4. 30일 새벽 영면하셨다.


나의 아버님은 강직한 성품으로 일제와 순사에게도 겁 없이 정의를 외치셨고, 아버님은 돈은 많이 벌어오지 못 하시면서도 언제나 당당하시고 가장의 위치를 확실히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일본 순사에게 많이 맞으시고 몸이 성치 못하신 아버님은 몸 붙여 일하시지 못하시면서도 수단이 좋으셨다. 언제나 8남매 자녀 양육에 고단하게 일하시던 어머님은 자녀들 듣는데 아버님을 나무라거나‘너희 아버지는 쓸데없다’고 무시하기보다는 언제나 “너희 아버지는 허수아비라도 꼭 계셔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아버님은 땀 흘리는 노동은 못하셨어도 대인관계를 잘 하셔서 부여, 서천, 보령 3군계에서 신용을 얻으시며 마을 주민들의 카운슬러로 사셨다. 나름대로 지혜가 있으셔서 자녀들 밥 굶기지 않으시고 늘 식객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녀교육은 요즘 흔히 말하는 과보호를 할 수 있는 여건은 아예 못 되었고 특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엄격한 아버지와 모든 것을 품어내시는 부드러운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우리 형제들의 성격은 원만하고 목회자와 사모가 넷이나 되며 큰일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다.


아버님은 주관이 뚜렷하시고 유교적인 전통적 가문에서 보수적인 분이셨다. 그러나 자녀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때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시진 못했지만 적당히 수용해 주셨다. 특히 가정의 화목을 중히 여기셨다. 어렸을 때는 조상 제사로 꽉 잡고 계셨고,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제사를 추도예배로 바꾸었고, 후에는 아예 살아계실 때 부모 모시는 게 옳다고 여겨 생신날엔 8남매가 다 모였고 명절이면 5형제가 다 모이는 것을 좋아하셨다. 바쁘다고 부모 생일도 모르고 명절날도 쉬지 못한다면 쓸데없이 바쁜 거라는 게 아버님의 지론이셨다. 이렇듯 우리 가정의 구심점이요 정신적인 지주이셨던 아버님의 자리는 컸다. 오늘은 그 아버지가 그립다. 양지도 여행을 좋아하는데 차가 있으니 모시고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사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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