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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어록
글쓴이 : 양지 날짜 : 13-02-17 22:08 조회 : 1660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어록

출처: http://www.leesj.or.kr


[3․1독립만세운동은 2천만 인심(人心)의 발로이다]


이상재 선생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거물급에 속하는 민족지도자였다. 이상재 선생이 민족대표에 들지 않은 것은 직접 운동의 일선에 나서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까닭도 있었지만, 만세 사건 이후의 수습과정에서 일본정부와 맞서 일을 처리할 인물이 그 밖에 달리 없었던 때문이었다.


선생은 배후에서 각 종교 계파 간 얽힌 문제를 잘 풀어 단결시키는데 공헌을 했는데, 일본 경찰은 3․1운동 직후 선생을 잡아 눈앞에 무시무시한 고문도구를 늘어놓고 주도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옳지! 왜놈들은 자기 부모도 치는 무지막지한 놈들이라더라. 그래, 늙은 나를 치려거든 어서 쳐 보아라!”


가미우찌(上內) 형사는 차마 고문을 하지 못하고 이야기로 심문을 계속했다.

“이 운동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이천만 민족이 다 같이 시작했다. 이천만 인심(人心)의 발로이다”

“아니, 그런 막연한 대답 말고 구체적으로 말하라.” “하나님의 지시로 했다.”

“당신이 한 짓이 아닌가?” “나도 했다.”

“연루자는 누구인가?” “연루자는 없다. 독립운동은 ‘獨’자의 뜻 그대로, 결국 자기 혼자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배후에 무슨 흑막이 있을 테지?”

“흑막? 그런 것은 없다. 2만 명이나 되는 경찰과 형사들이 전국에 거미줄처럼 깔렸으면서도 너희가 그것을 몰랐다니 말이 되는가? 이제 와서 흑막 운운하는 것은 이토록 문제가 커지니까 책임을 회피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누가 심문하고 누가 심문을 당하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이상재 선생은 오히려 당당하게 검사를 다그쳤다.



["별떡 만들어줄까, 달떡 만들어줄까?"]


1926년 서울기독교청년회(서울YMCA) 강당에서 시국토론회를 할 때였는데, 그때 연사가 마침 이상재 선생이었다. 이상재 선생은 연단에 올라서더니 이야기 한 토막을 시작했다.


"여러분, 내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까지 오면서 길에서 본 일부터 먼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에 오는 중인데 호떡 한 개를 가지고 두 아이가 서로 싸우고 있더군요. 한 아이는 중학생이고 한 아이는 소학생인 듯한데, 소학생이 가진 호떡을 중학생이 빼앗아서 처음에는 별떡을 만들어 준다고 하면서 조금씩 먹다가, 소학생이 울면서 앙탈을 하니까 이번에는 달떡을 만들어 준다고 살살 꾀어서 결국은 그 호떡을 다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학생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자꾸 울고만 있습디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청중들은 장내가 떠나갈 듯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이상재 선생이 한 이야기는 바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던 과정을 빗대어 풍자한 것이었다.


강당 한구석에서 날카롭게 쏘아보며 감시의 눈길을 보내던 ‘미와(三輪)‘형사는 큰 소리로 외쳤다. "변사(辯士) 중지!" 그리곤 경찰들을 동원해 강연회를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다.



["허허, 사정을 아는 사람이 또 주겠지, 뭐"]


이상재 선생이 서울기독교청년회(서울YMCA)로부터 받는 월급 오십 원은 식구들의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그런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상재 선생은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히려 어려운 처지의 남을 걱정하였다.


어느 날, 어떤 청년이 이상재 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때는 추운 겨울이었는데, 방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런 추위는 젊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것인데 칠순의 노인이 냉골에 앉아있는 것은 너무 민망한 노릇이었다. 그 청년은 주머니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어 선생 앞에 내놓았다.


"선생님, 얼마 되지 않지만 우선 땔감이라도 사시지요. 방이 너무 차갑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 돈을 받아 넣었다. 그 청년이 돌아가고서 한 학생이 찾아와, 내일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나는데 여비가 없음을 호소했다. 그러자 선생은 조금 전에 자신이 받아 넣었던 그 돈을 거침없이 내어주며, "공부나 열심히 하게!" 하고 격려했다. 학생이 돌아간 후, 처음부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선생님 그 돈을 다 주시면 땔감은 무엇으로 사시렵니까?" "허허, 사정을 아는 사람이 또 주겠지, 뭐."


사정을 아는 사람이란 옆에서 죽 지켜보고 있던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할 수 없이 이상재 선생에게 돈을 내놓고 말았다. 이상재 선생의 청빈함은 늘 딴 사람을 감동시키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때 아닌 '개나리' 꽃이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


황성(서울)기독교청년회에서 주관하는 수많은 강연회에 이상재 선생은 거의 빠짐없이 사회를 보았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 모인 실정이었으므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일본경찰의 눈초리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한번은 이상재 선생이 어느 강연회의 사회를 보고자 단상에 올라서 보니, 청중들 사이에 일본형사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단순한 종교집회에 이처럼 많은 형사가 온 것이 선생의 눈에는 몹시 거슬렸다.


이상재 선생은 물끄러미 먼 산을 쳐다보더니,

"때아닌 개나리꽃이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하면서 짐짓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형사들을 제외한 일반 청중들은 이상재 선생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내 알아차리고 강당이 떠나갈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당시에 형사는 '개'라 낮춰 부르고, 순경들은 '나리'라 불렀으므로 이상재 선생이 개나리꽃이라 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몰래 끼어 있는 일본 형사들을 놀리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상재 선생의 재치와 기지에 탄복한 청중들이 배를 잡고 웃어대자, 형사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화도 내지 못한 채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말았다. 일본인 형사들이 없는 강연회가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끝까지 진행된 것은 물론이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 종교집회에 형사들이 웬 일이오? 썩 나가 주시오." 하며 성을 내었을 테고, 거기에 형사들이 쉽사리 응해줄 리도 만무했을 테지만, 이상재 선생은 슬쩍 던지는 말 한마디로 일본인 형사들을 다 내어 쫓았던 것이다.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 천재들이니 동경으로 이사하면 일…"]


이상재 선생의 풍자와 해학은 끝이 없었다. 번번이 당하는 것은 당연히 얼빠진 관리와 일본인들이었다.


한번은 조선미술협회라는 단체가 성립되어 그 발기 식이 성대히 개최되었다. 그 식장에는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일본인 교관들과 우리 측 대신들도 여러 명 참석하는 큰 행사였다. 이상재 선생도 초청을 받아 그 식에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이상재 선생은 이완용과 송병준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인에 붙어 간도 쓸개도 다 내팽개치고 나라 말아먹는 문서에 도장을 찍었던 자들이니 이상재 선생이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대감들께서도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두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영감,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천재들이니 동경으로 이사하시면 일본도 또 망할 게 아니겠소?"

일본인 주위에 붙어서 있던 친일파 인사들은 이 절묘한 우스갯소리에 웃을 수도 화낼 수도 없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했으니 일본이 그…]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 체결 이후, 우리나라의 종교계(宗敎界) 중진들로 일본시찰단을 조직해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들의 강대함을 자랑하려 했다. 이상재 선생도 이 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일본 각지를 두루 살피고 마지막엔 동경에 가서 대규모 군수병기창을 구경하게 되었다. 일종의 위협이자 시위였다.


그날 밤에 열린 시찰단 환영회에서 각자의 느낀 바를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이상재 선생이 마지막으로 일어나서 발표하게 되었다. 이상재 선생은 침통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병기창을 구경하였더니 대포와 총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과연 일본은 강국의 면모에 손색이 없습디다. 그러나 나는 퍽 유감이었소. 성경에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했으니 나는 일본이 혹 그리될까 그것이 큰 걱정이오."


함께 자리했던 일본인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이 얼마나 날카로운 예견이었던가? '군국주의'의 깃발 아래 총검을 휘두르며 아시아 전체를 피바다로 만든 후, 마침내 그들 자신이 총칼에 패망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상재 선생은 이처럼 말 가운데 칼을 숨기고 있던 뛰어난 웅변가였다. 웅변이란 큰 소리로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단 한 마디의 조용한 말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말솜씨인 것이다.



["선비는 책을 가까이 두어야"]


호조판서가 된 박정양이 먼 곳으로 장기간 출장을 가며 집안의 벽장열쇠를 이상재 선생에게 맡겼다. 열쇠를 맡은 선생이 어느 날 그 벽장을 열어보니 대부분이 선물로 들어온 갖가지 옷감과 과일, 제사용품, 약과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생은 그 물건들을 죄다 끄집어내고 마루방에 제멋대로 쌓여 있는 책들을 차곡차곡 그 벽장 안에 쌓아 넣었다. 박 판서가 출장에서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집안에서 이런 맹랑한 일을 벌일 사람은 이상재 선생뿐이란 걸 박정양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판서는 이상재 선생을 꾸짖지 않았으며 담담히 받아들인다. 벼슬이 높아지거나 재물이 모여든다 해서 선비 된 도리로서 책을 멀리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훈계를 알아챈 것이다. 일개 식객의 신분으로 주인 대감에게 이토록 당돌하고 짓궂은 장난을 할 수 있었던 이상재 선생이나, 그것을 알면서도 꾸짖거나 힐책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 있는 훈계로 받아들인 박정양 판서나 모두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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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형 13-02-23 12:20
목사님 아주 잘 필독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식견과 도량이 넓으셔서 한번 살피시고 저 보다도 더 훌륭하게 게시하여 부끄럽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교회회 발전을 기도드리며 감사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서천군 문화관광 해설사 양철형 올림
양지 13-02-23 13:56
바쁘실텐데 오셨군요.
사실 몇 가지 확실하게 게시하고자 연락했었습니다.
여행사진방에 사진 올렸는데 보셨지요?
후레시를 사용하지 않고 찍었더니 많이 흔들렸습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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